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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온달과 평강공주의 사랑이야기 진실3

역사 이야기

by NomadicAdventurer 2020. 7. 14.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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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달은 어떻게 신진세력이 될 수 있었을까요? 이는 당시 고구려 사회가 무예를 중시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수렵도>에서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당시에는 뛰어난 무예실력과 전쟁에서 공을 세우는 것이 출세의 중요한 통로였습니다. <삼국사기 열전 온달편>에는 이렇게 적혀있습니다. '매년 3월 3일이면 고구려인들은 낙랑 언덕에 모여 사냥대회를 여는데 온달이 가장 많이 사냥한다.' 당시 고구려에서는 사냥대회가 인재등용의 장이었습니다. 온달은 사냥대회를 통해서 신진세력으로 떠올랐습니다. <삼국사기 열전 온달편>에는 이렇게 적혀져 있습니다. '후주의 무제가 군사를 내어 요동에 쳐들어오자 온달이 선봉이 되어 크게 공을 세우니 여러군사가 기세를 타고 맹렬히 싸워 크게 이겼다.' 온달은 고구려에서 가장 뛰어난 무예실력을 가진 장군이었습니다. 경상북도 안동시에 북후면에는 <적석탑>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고구려 시대의 탑은 경상북도 일대에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탑들은 고구려의 영향력이 경상도까지 미쳤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와 같은 고구려의 탑 양식들이 경상북도에 나타나는 것일까요? 온달은 전쟁터에 나가기 전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신라가 한강 이북의 땅을 공격해 자기의 땅으로 삼으니 백성들이 분통하고 한스럽게 여겨 한번도 부모의 나라를 잊은 적이 없사옵니다." 고구려는 광개토대왕시기 신라땅 깊이 침투해 100년 이상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런데 6세기 중반 신라의 반격이 시작되었습니다. 고구려가 내부의 갈등과 중국 북방민족과의 전쟁에 휘말려 있는 사이 신라가 한강유역을 공격하였습니다.  결국 551년 신라는 거칠부 죽령 이북 10군(제천, 영월, 원주, 가평, 양구, 화천, 김화, 희양)을 확보하였습니다. 충청북도 충주시 하늘재에는 <계립령 유허비>가 있습니다.  계립령은 문경새재의 동쪽에 위치한 하늘재이고 죽령은 풍기 북쪽에 위치한 고개를 뜻합니다. 이 지역은 551년 고구려가 신라에게 뺏겼다가 고구려 장수 온달이 40년만에 되찾은 지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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